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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간화선 - 3. 깨달음과 성성적적의 관계는 어떠한가?

스미트라즈 2007. 11. 27. 22:48

3. 깨달음과 성성적적의 관계는 어떠한가?

 

     적적한 마음은 모든 이것과 저것을 여읜 고요하고 편안한 마음이요, 성성한 마음은 한결같이 깨어 있

 

는 밝고 맑은 마음이다. 마음이 고요하고 밝으면 모든 일에 막힘이 없고 어떤  경계에도  자유롭다.  이것

 

은 애써 이룬 수행의 열매가 아니라 본래 그러한 자성의 참모습이다.

 

     그래서 영가 선사는 "적적하기도 하고 성성하기도 하면 분명히 깨어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고요하

 

게 될 것이다. 이것이 곧 근원으로 돌아가는 묘한 성품이다."라고 말했다.

 

     육조 혜능 선사도 "위없는 대열반이여, 원만하고 밝아 항상 고요하고 밝게 비춤이로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밝게 비춘다 하여 '조照'라 표현하지만, 그것은 '깨어 있다'는 성惺과 같은 의미이다. 성성과

 

적적의 관계는 선사들의 어록에서는 체體와 용用, 살殺과 활活, 정正과 변, 공적空寂과 영지靈知, 정定

 

과 혜慧, 진공眞空과 묘유妙有,이理와 사事등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적적은 모든 양변을 여의어 산란한 마음을 쉰 경지이기 때문에 공적이요, 살殺이며, 삼매며, 정이다.

 

성성은 양변을 여읜 곳에서 나온 밝은 지혜이기 때문에 묘유요 활이요 영지라 한다. 그렇다고 적적과 성

 

성, 공적과 영지, 살과 활, 정과 혜가 따로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본성은 두 가지가 함께  어우러

 

져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모습으로 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

 

어라(應無所住 而生基心)"고 했다.

 

     고요한 '적'만 있고 깨어 있는 '성'이 없으면 목석과 같은 공허한 무기에 떨어진다. '성'만 있고 '적'이

 

없으면 분열과 대립만 있을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혜능 선사는 『육조단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선지식들아, 나의 가르침은 정과 혜로 근본을 삼는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미혹하여 혜와 정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

 

     의 몸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곧 정은 혜의 체요.  혜는 정의 용

 

     이다.  혜가 작용할 때 정이 혜에 있고, 정이 작용할 때 혜가 정에

 

     있다.

 

          선지식들아, 내가 말하는 뜻은 정. 혜가 함께 한다는 것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짐짓 정을 먼저하여 혜를 낸다거나 혜를 먼저

 

     하여 정을 낸다고 해서 정과 혜가 저마다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소견을 내는 이는 법에 두 모양이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착함을 말하면서 마음이 착하지 않으면 혜와 정을 함께  함이 아니

 

     요, 마음과 입이 함께 착하여 안팎이 한 가지면 정. 혜가 함께 하는

 

     것이다.

 

 

     정과 혜 그리고 적적과 성성의 관계에 대하여 보조 선사는 『수심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르침의 핵심을 말한다면, 이치에 들어가는 천 가지 문이 선정

 

     과 지혜 아님이 없다. 그 요점을 들자면 자기  성품의  본체와  작용

 

     두 가지다. 앞에서 말한 텅 빈 고요함과 신령스런 앎이 그것이다.

 

     선정은 본체이고 지혜는 작용이다. 그런데 본체에 즉한  작용이므로

 

     지혜는 선정을 떠나지 않고, 작용에 즉한 본체이므로 선정은 지혜를

 

     떠나지 않는다. 따라서 선정이 지혜이므로 고요하면서도 항상  명확

 

     히 알고, 지혜가 선정이므로 명확히 알면서도 항상 고요하다.

 

 

     고요하면서도 항상 명확히 알고, 명확히 알면서도 고요하다는 적이상지寂而常知, 지이상적知而常寂

 

은 다른 말로 적이상조寂而常照, 조이상적照而常寂이다. 고요하면서도 밝게  비추고,  밝게  비추면서도

 

고요하다는 뜻이다. 이는 구경각에 이른 상적상조常寂常照, 상조상적常照常寂, 적적성성의 상태를 일컫

 

는다. 다른 말로 해서 차조동시遮照同時요, 쌍차쌍조雙遮雙照라 한다. 여기서 차遮란 양변과 모든 분별

 

심을 여읜 것을 말한다. 그 양변을 여읜 중도의 자리에서 바로 밝은 지혜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선정과 지혜, 적적과 성성은 둘이 아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

 

를 이루고 있다. 만약 적적만 있고 성성이 없다면, 지혜가 없어 번뇌가 다하지 않은 상태로 이것은  외도

 

의 수행과 하등 다를 게 없다. 성성적적이 제대로 된다면 그것은 불교수행이며 그  자리가  우리의  본래

 

모습이다.

 

     앞에서도 애기했지만 화두를 드는 과정에서도 적적성성한 상태를 지켜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적적성성한 삼매가 본래 갖추어져 있는 본분 자리의 성성적적과 상응해서 한바탕 크게 깨달으면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 이 뭣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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