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수행을 한다고 해도 보이지가 않으니 답답합니다.
어릴 때부터 힘들게 하는 딸하고 씨름 중입니다.
제 문제로 보고 요즘은 그냥 놔두는데 남 같습니다.
그런데 공부 안 하는 모습은 속상하고요. 공부도 저 하는 대로 놔둬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변
질문 중에 잘못된 것이 있습니다. “수행을 한다고 해도 보이지가 않으니 답답합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수행을 잘못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답답한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수행이지요. 그런데 이분은 절을 한다든지, 참선을 한다고 앉아 있다든지, 책을 본다든지 하는 걸 수행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절을 하거나, 경을 읽거나, 명상을 하는 것은 바로 이 답답한 마음의 본체를 알아차리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답답한 마음의 본체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건 수행이라고 이름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일단 본인이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수행이 안 돼서 괴롭습니다.”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수행인데,
수행이 안 돼서 괴롭다는 말은 수행이라는 어떤 상에 지금 집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괴로움은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생깁니다.
이분은 지금 수행이라고 하는 어떤 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절을 하거나, 명상을 하거나, 경을 읽는 걸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데서 오는 문제입니다.
수행을 하라는 말은 괴로워하는 마음의 본질을 보라는 것입니다. 괴로움은 어떤 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데서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니 수행을 한다고 해도 보이지가 않으니 답답하다고 할 때, 이 답답한 마음이 어디에서 오는 건지 이것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 답답한가? 무엇 때문에 답답한가?”
“아이가 애를 먹이니까 답답하다.”
“아이가 어떻게 애를 먹이는가?”
“아이가 공부를 안 한다.”
“아이가 공부를 안 할 뿐이지 아이가 당신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느냐?”
이렇게 묻고 답하기를 하다 보면, 아이가 공부를 안 해도 안 보면 안 답답한데, 자기가 볼 때 아이가 공부를 안 하면 답답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공부를 안 하는 게 자기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직접적인 요인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답답할까요? 아이가 TV를 보고 있으면 답답하고, 아이가 책을 보고 있으면 괜찮은가요?
그 책이 만화책이면 어떡할 거지요? 그 TV가 공부에 크게 도움이 되는 내용이라면 또 어떨까요?
이런 식으로 따져 보면, 이것이 다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왜 답답한가?’ 하고 자기 마음을 살피는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질문하신 분은 이렇게 자기 마음을 살피는 태도가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힘들게 하는 딸하고 씨름 중입니다.”라고 하셨는데, 이 말 속에는 딸이 자기를 힘들게 한다는 생각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딸이 나를 힘들게 한다.’라는 생각을 하는 한 이건 수행의 ‘수’자도 꺼내면 안 됩니다.
‘딸이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은 ‘남이 나를 괴롭히고 남이 나를 화나게 만든다’는 얘기거든요.
이것이 바로 전도몽상입니다. 지금 뭔가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생각이 전도몽상이기 때문에 이 생각을 바꾸는 걸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분은 절에 다니면서 아직도 법문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있는 거예요. 나무라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잘 들으세요. 법문을 귀담아 듣지도 않고, 불교의 불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99프로가 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또한 현실입니다.
‘남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하는 한 이건 수행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금 경계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화를 내고 짜증을 내도 금방 ‘아, 내가 경계에 사로잡혔구나.’ 아이가 자기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해서 괴롭더라도 금방 ‘아이고, 내가 또 경계에 사로잡혔구나.
’ 이렇게 돌이켜야 수행입니다. 이렇게 ‘내가 사로잡혔구나. 내가 또 경계에 끄달리는구나.’ 이렇게 돌이키면 금방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제 문제로 보고 요즘은 놔두는데 남 같네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도 지금 공부를 잘못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어, 내가 경계에 끄달렸구나.’ 하고 내려놓는 게 자기 문제로 보는 거지,
‘너야 텔레비전을 보든지 말든지, 놀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알아서 해라.’라고 하는 것은 자기 문제로 보는 게 아닙니다.
이것 역시 경계에 끄달리는 태도입니다. 남같이 느껴지는 중요한 이유는 지금 외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 딸이다. 너는 텔레비전 보면 안 된다.’ 이렇게 할 때는 딸의 모습에 집착하는 것이고,
‘네가 텔레비전을 보든지 공부를 안 하든지 그건 네 문제니까 난 모르겠다.’ 이렇게 하는 건 외면하는 것입니다.
집착하는 것과 외면하는 것은 이미 딸의 행위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데서 빚어진 것입니다. ‘
나쁜 짓을 하는데 간섭할 것이냐, 내버려둘 것이냐.’라는 건 이미 나쁘다는 생각이 일어나 버린 다음의 얘기입니다. ‘
나쁘다, 좋다’ 이전으로 돌아가서 다만 그것을 그것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또는 그 행위를 보고 기분 나쁨이 일어나면 이것이 ‘나의 느낌이다. 나의 감각이다.’
이렇게 보는 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수행문을 읽으면서 하는 것입니다.
관점이 올바로 서 있지 않으면 30년 수행을 한다고 해도 한 발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공부 안 하는 모습은 속상하고요.” 이것도 똑같은 얘기입니다. 지금 경계에 끄달려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아이로부터 속상한 게 왔다는 말이지요. “공부도 저 하는 대로 놔둬야 하는지요.”라고 하셨는데,
이건 공부를 하든지 말든지 내버려둬야 하는지, 외면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을 외면하는 것이 고행주의라면, 이걸 간섭하는 것은 쾌락주의에 속합니다.
그런데 중도라는 것은 둘 다 놓는 것입니다. ‘외면하지도 않고 간섭하지도 않는 그 제3의 길이 현실적으로 도대체 무엇이냐?
외면을 하든지 간섭을 하든지 길은 그 둘밖에 없지 않느냐?’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데, 이것은 상대의 행위가 잘못됐다는 전제 위에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수행은 상대의 행위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잘못됐다’라고 이미 분별심을 내버린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간섭을 하거나 외면을 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이 생각 자체가 ‘나’한테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를 돌이키라는 것은 잘못됐다는 생각을 내가 일으킨 것이니 이걸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잘못됐다는 생각을 내려놓게 되면 ‘간섭할 것이냐, 참을 것이냐’ 하는 문제는 사라집니다.
수행은 ‘간섭을 할 것이냐, 외면을 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간섭할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이 둘은 모두 아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잘못되었으니 고쳐야 하느냐, 잘못되어도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이냐?’ 하는 질문입니다.
잘못되었다는 이것이 누구의 생각입니까? 자기 생각이지요.
그러니 잘못되었다는 이 생각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놓아 버리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간섭할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하는 건 저절로 사라져 버립니다.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놓아버리면 간섭이고 외면이고 저절로 사라지게 됩니다.
지금 법문을 들어도 이건지 저건지 구분이 안 되고 자꾸 헷갈리는 이유는
잘못됐다는 그 생각을 내려놓지 못하고, 그 전제 위에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수행문을 다시 읽으세요. 잘못됐다고 하는 이 생각이 분별심입니다. 이걸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 생각을 일으킨 것에 대해서 참회해야 합니다. ‘아, 내가 또 한 생각 일으켰구나, 내가 한 생각 또 사로잡혔구나.’
이렇게 본질로 돌아가서 공부를 해야 공부가 됩니다.
잘못됐다는 생각을 불러 일으켜 놓고 그걸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이냐고 하는 건 망상 위에서 노는 것입니다.
꿈속에서 좋고 나쁜 것을 따지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꿈에서 깨야 하는데 꿈속에서 강도를 만나 ‘도망갈 거냐, 대적할 거냐?’ 이걸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