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니까야 산책

스미트라즈 2009. 4. 3. 09:39

 니까야 산책

                                                                          


 

 집착의 의미는 마음 공부에서 어떤 위치에 있을까.

 오늘날 외향적 가치에 경도되고 명성과 환대에 집착하면서

마음 공부하는 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존을 방문하여 환담하고 있던 왕이 지나가는 일곱 명의 탁발 수행자들에게

일어나서 일일이 공경의 예를 표한 후 공부가 잘된 수행자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스승의 답변이다.


 “대왕이여, 그들이 계율을 지니고 있는지는 함께 살아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같이 살아 보아야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주의 깊어야 알지 주의가 깊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지혜로워야 알지 우둔하면 알 수 없습니다.

 대왕이여, 그들이 청정한지는 같이 대화를 해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대화를 해야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주의 깊어야 알지 주의가 깊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지혜로워야 알지 우둔하면 알 수 없습니다.

 대왕이여, 그들이 견고한가하는 것은 재난을 만났을 때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재난을 만났을 때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주의 깊어야 알지 주의가 깊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지혜로워야 알지 우둔하면 알 수 없습니다.

 대왕이여, 그들이 지혜가 있는지는 논의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논의해야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주의 깊어야 알지 주의가 깊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지혜로워야 알지 우둔하면 알 수 없습니다.” (쌍윳따 니까야)


 이어서 그 뜻을 다시 게송으로 요약하신다.


 “사람은 색깔과 형상으로 알 수 없고

 잠시 보아서는 믿을 수 없다네.

 몸을 잘 삼가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삼가지 않는 자들이 세상을 돌아다니네.

 흙으로 빚은 가짜 귀걸이처럼

 금박을 입힌 반달 모양의 동전처럼

 어떤 이들은 화려히 치장하고 돌아다니니

 안으로는 더럽고 밖으로만 아름답다네.”


 자신의 공부가 부족함을 알지 못하고 존대 받고자하는 행위에는

그 속에 이득과 명예에 대한 욕망이 숨어있음을 다음과 같이 설파하신다.


 “수행승들이여, 이득과 환대와 명성은 두렵고 자극적이고 거친 것으로

위없는 안온을 얻는 데 장애가 된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이와 같이 ‘이 존자는 은가루가 가득 찬

황금의 발우를 얻기 위해 고의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나 자신의 마음으로 미루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안다.

그런데 나는 나중에 그가 이득과 환대와 명성에 압도되고

마음이 현혹되어 고의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본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이득과 환대와 명성은 두렵고

자극적이고 거친 것으로 위없는 안온을 얻는데 장애가 된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우리는 이미 생겨난 이득과 환대와

명성을 버릴 것이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이득과 환대와

명성에 집착하지 않고 지낼 것이다.’라고 배워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심지어 아라한에게도 이익과 환대와 명예가 장애라고 하신다.


 “수행승들이여, 번뇌를 소멸한 거룩한 수행승(아라한)에게도

이득과 환대와 명성은 장애라고 나는 말한다.”


 이와 같이 말씀하셨을 때 존자 아난다가 거듭 세존께,

번뇌를 소멸한 어떠한 수행승에게도 이득과 환대와 명성이

장애가 되는지 질문한다.


 “아난다여,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성취한 자에게도

이득과 환대와 명성은 장애라고 나는 말한다.

 아난다여, 또한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전념하여 현세에 즐거움을 누리는

선정을 성취한 자에게도 이득과 환대와 명성은 장애라고 나는 말한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이득과 환대와 명성은 두렵고 자극적이고

거친 것으로 위없는 안온을 얻는 데 장애가 된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그대는 ‘나는 이미 생겨난 이득과 환대와

명성을 버릴 것이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이득과 환대와 명성에

집착하지 않고 지낼 것이다’라고 배워야 한다.

아난다여,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이득과 환대와 명성은 집착의 가장 근저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원초적인 경향성 가운데 자기중심성(나르시시즘)은

자각하기 어려운 집착이다. 자기애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이 뿌리 깊은 자기중심성은 자만과 자애를 특징으로 한다.

이 자기중심성은 종파주의와 집단 이기주의를 낳게 되어

골 깊은 당쟁, 보수와 개혁, 동서 갈등, 노사 갈등, 코드 논쟁 등,

갖가지 사회적 분열을 일으키는 조건이 된다.

그뿐이랴. 부부갈등과 가정폭력, 종교적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오늘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이 많지만

어느 것도 정곡을 찌르지 못한 채 개인적 사회적 고통이

되풀이 반복되고 있음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자만의 깊은 뿌리에 직면한

라훌라는 스승께 해법을 묻는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관찰하면 이 의식을 갖춘 몸과 밖에 있는

모든 형상에서 나라는 고집, 내 것이라는 고집의 교만스런 경향을 떠난

마음이 생겨나서 여러 가지 자만을 떠나서 적정한 해탈이 이루어지겠습니까?”

 

“라훌라여, 그것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혹은 안에 있든 밖에 있든,

혹은 거칠든 미세하든, 혹은 열등하든 수승하든,

혹은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간에 어떠한 물질이라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참으로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올바로 알아서

관찰하면 집착이 없는 해탈이 이루어진다.

 

라훌라여, 그것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혹은 안에 있든 밖에 있든,

혹은 거칠든 미세하든, 혹은 열등하든 수승하든, 혹은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간에

어떠한 느낌이라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참으로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올바로 알아서

관찰하면 집착이 없는 해탈이 이루어진다.

  

라훌라여, 그것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혹은 안에 있든 밖에 있든,

혹은 거칠든 미세하든, 혹은 열등하든 수승하든, 혹은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간에

어떠한 지각이라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참으로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올바로 알아서

관찰하면 집착이 없는 해탈이 이루어진다.

  

라훌라여, 그것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혹은 안에 있든 밖에 있든,

혹은 거칠든 미세하든, 혹은 열등하든 수승하든, 혹은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간에

어떠한 형상이라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참으로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올바로 알아서

관찰하면 집착이 없는 해탈이 이루어진다.

  

라훌라여, 그것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혹은 안에 있든 밖에 있든,

혹은 거칠든 미세하든, 혹은 열등하든 수승하든, 혹은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간에

어떠한 의식이라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참으로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올바로 알아서

관찰하면 집착이 없는 해탈이 이루어진다.

 

라훌라여,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관찰하면

이 의식을 갖춘 몸과 밖에 있는 모든 형상에서 나라는 고집,

내 것이라는 고집의 교만스런 경향을 떠난 마음이 생겨나서

여러 가지 자만을 뛰어넘어 적정한 해탈이 이루어진다.”

(쌍윳따 니까야)


 이러한 뿌리 깊은 경향성은 아주 오래된 것이어서 조건반사적으로

부지불식간에 자동적으로 작용하지만 그 바탕이 있다.

놀랍게도 스승께서는 그것은 의식적 무의식적 의도라고 말씀하신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도모하여

무엇을 잠재시킨다면 이것이 의식을 일으키는 바탕이 된다.

바탕이 있으므로 의식이 지속하게 된다.

그 의식이 지속되고 성장하면 미래에 다시 태어나고

생을 바꾸게 된다. 미래에 다시 태어나고 생을 바꾸게 되면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의 원인이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생각하지 않고 도모하지 않더라도 잠재시킨다면

이것이 의식을 일으키는 바탕이 된다. 바탕이 있으므로 의식이 지속하게 된다.

그 의식이 지속되고 성장하면 미래에 다시 태어나고 생을 바꾸게 된다.

미래에 다시 태어나고 생을 바꾸게 되면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의 원인이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참으로 생각하지 않고 도모하지 않고 잠재시키지 않는다면,

이것은 의식을 일으키는 바탕이 되지 못한다.

바탕이 없으므로 의식은 지속하지 못하게 된다.

그 의식이 지속되지 않고 성장하지 않는다면,

미래에 다시 태어나고 생을 바꾸게 되지 않는다.

미래에 다시 태어나고 생을 바꾸게 되지 않는다면,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해서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의 원인이 없어진다.”

(쌍윳따 니까야)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무언가를 잠재시킨다면

고통은 생겨나고 잠재된 것을 통찰하여 의도하지 않고 잠재시키지 않으면

고통은 생겨나지 않는다고 스승께서는 거듭 자세히 설명하신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도모하고 무엇을 잠재시킨다면

이것이 의식을 일으키는 바탕이 된다.

바탕이 있으므로 의식이 지속되게 된다.

그 의식이 지속되고 성장하면 명색이 생겨난다.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며,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면,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의 원인이 함께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생각하지 않고 도모하지 않더라도 잠재시킨다면

이것이 의식을 일으키는 바탕이 된다.

바탕이 있으므로 의식이 지속되게 된다.

그 의식이 지속되고 성장하면 명색이 생겨난다.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며,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면,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의 원인이 함께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참으로 생각하지 않고 도모하지 않고 잠재시키지 않는다면,

이것은 의식을 일으키는 바탕이 되지 못한다.

바탕이 없으므로 의식은 지속하지 못하게 된다.

그 의식이 지속되지 않고 성장하지 않는다면,

명색은 생겨나지 않게 된다.

명색이 없으면 여섯 감역이 생겨나지 않으며,

여섯 감역이 없으면 접촉이 생겨나지 않으며,

접촉이 없으면 느낌이 생겨나지 않으며,

느낌이 없으면 갈애가 생겨나지 않으며,

갈애가 없으면 집착이 생겨나지 않으며,

집착이 없으면 존재가 생겨나지 않으며,

존재가 없으면 태어남이 생겨나지 않으며,

태어남이 없으면

늙음과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해서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의 원인이 생겨나지 않게 된다.”

(쌍윳따 니까야)


 이러한 의도는 업이라 표현하기도 하지만

오랜 옛날 기억할 수 없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것이다.

이는 의식할 수 없는 경향성으로 잠재하게 되므로

즉각적인 통찰에 의해 해결되지 않는다.

그 가운데 이 몸이 나라는 생각은 대표적인 것이어서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아 좀처럼 깨뜨릴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 몸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것도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이전의 행위로 만들어진 것이며,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느낌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그래서 고귀한 제자는 연기의 법칙을 듣고

철저하게 사유한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쌍윳따 니까야)


 스승께서 밝히신 연기의 진리는 역사성이 바탕이 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현재의 행동 양식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그것을 현재의 경험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음이 고통으로부터

치유이고 해방이다.

수행이 현상적이고 표층적 수준에 머물거나 즉시적이면

스승께서 깊이 사유하고 숙고하시어 얻어낸 성찰들과 만나기 어렵다.

통찰의 미세한 차원과 다시 삶 속에 통합시키는 노력이 결합되어야 하고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현재이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공부는 세상과 별개의 일이 되지 않고

어두움에 빛이 되어 밝은 세상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승께서는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마음처럼 빨리 변화하는 다른 유일한 것은 없다.

마음은 본래 청정하고 밝은 것이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오염된다.

닦지 않고 익히지 않은 마음처럼

불이익과 불행을 가져오는 다른 유일한 것은 없다.

반대로 닦고 익힌 마음은 이익과 행복을 가져온다.”고 하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념 수행을 열심히 할 것을 주문하신다.


 “수행승들이여, 하나의 원리를 닦고 익히면,

나는 있다는 망상이 끊어진다.

그 하나의 원리란 무엇인가?

신체에 대한 관찰이다.

수행승들이여, 이 하나의 원리를 닦고 익히면,

나는 있다는 망상이 끊어진다.

 수행승들이여, 하나의 원리를 닦고 익히면,

잠재적 경향이 제거된다.

그 하나의 원리란 무엇인가?

신체에 대한 관찰이다.

수행승들이여, 이 하나

의 원리를 닦고 익히면,

잠재적 경향이 제거된다.”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고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사리뿟따의

 

‘모든 집착을 소멸하고 정념을 확립한다.

정념을 확립하는 까닭에 번뇌가 따르지 않고

스스로를 게을리 관찰하지 않는다.’

 

는 대답처럼 정념으로 자기 관찰을 깊이 수행하여

자만의 뿌리를 끊는 길 밖에 없다 할 것이다.


출처 : 금강(金剛) 불교입문에서 성불까지
글쓴이 : 흐믓꽃 원글보기
메모 :